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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언어에속지않는법 #허새로미 #신촌저녁독서모임
*읽은 뒤 기록하고 싶은 구절과 감상을 적습니다. 책에 대한 설명은 두서가 없습니다.



최근 부족한 경제활동을 보강하기 위한 긴축재정을 시작했다. 바로 ‘뽐뿌'를 하는 것. 생필품들을 ‘최저가로 사기' 에 도전하고 있다. 물론 뽐뿌는 나같이 아무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뽐뿌에서 알려주는 제품을 사기 위해선 다양한 수고로움이 들어있다.
우선 많은 쇼핑몰과 소셜커머스에 회원가입을 해야하는데, 절대로 한번에 다 가입 해 버리면 안된다! 거대자본 놈들은 매우 영악하기 때문에 회원가입쿠폰의 기회도 매우 시기적절해야 한다. 때문에 항상 꼼꼼한 시장조사 후 가입을 추천한다.
그 이후에도 각종 프로모션 쿠폰을 다운 받은 뒤 내가 사려는 제품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숨어있는 쿠폰이 너무 많다. 꾸역꾸역 어렵사리 결제 단계에 넘어갔다고 끝이 아니다. 카드 할인은 즉시할인과 청구할인을 확인해야한다. 후훗… 첨 접했던 그 땐(3달전) 참 어렸지…
헌데 열심히 사고 나면 뭔가 묘하다. 평소 사던 가격보다 훨씬 싸게샀지만 엄청 많이 사버려서 지출이 늘어있다. 그래도 장기적으로 보면 싼게 맞다. 근데 뽐뿌에 투자하는 시간이 나날이 길어진다. 언제부턴가 뽐뿌를 달고 산다. 필요한게 없어도 수시로 확인해야하는 이상한 강박이 생겼다.
삶이 망가지고 있다. 결국 뽐뿌를 끊어야만 했다. 힘든 싸움이었지. 손은 뽐뿌를 끊었지만 머릿속에선 니코틴처럼 끈질기다.
싸게 사는 법에 맛들려서 정가로 사면 뭔가 속는 느낌이다. 동네 슈퍼에서 사소한 걸 사더라도 비싸보인다. 그렇다고 싸게 사고 나면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하나…?’ 하고 현타가 온다. 내 자신한테 속은 느낌이다. 속지 않는 법을 알아야겠다.
*모임은 20년 3월 3일에 할 뻔 했지만 모두가 불참인 관계로 취소됐다. 다행히 4월 7일에 도서가 한 번 더 선정돼서 모임을 할 줄 알았지만 역시나 모두 불참으로 취소. 그래도 우린 부끄럽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독서모임 같은 소규모 사모임은 금지권고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코로나가 면죄부를...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허새로미 (2019)
-한국어에 상처 받은 이들을 위한 영어 수업
1 부_나를 속이는 말
내용을 듣고 싶지 않았는지 아니면 존대를 더 강력하게 사용했어야 했는지 심지어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하던 얘기는 예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혹은 전체가 기각되고 만다. 여러 번 들으면 입 열기 무서워지고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게 된다.
말을 예쁘게 하라는 소리를 듣는 건 그런 일이다. 정확히 뭘 바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요구한 적도 없는 승인을 유예당하는 일. 전달하고픈 핵심보다는 그 외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각을 내면화하는 일.
나는 나이를 먹으며 누구에게도 말 예쁘게 하라는 요구를 하지 않으려 다짐한다. 말을 예쁘게 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는데 그런 요구가 난무하는 것은 텅 빈 신호를 보내는 일이고, 텅 비었는데 화자의 기분만을 전달하는 언어 신호는 관계를 망칠 뿐 아니라 나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한다. 요구한 사람은 자기가 뭘 바랐는지 모르게 되고, 강요당한 사람은 예쁘든 못생겼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침묵을 지키고 만다. 누가 내게 말을 예쁘게 하라고 한다면, 아무리 그 요구가 '예쁜 입’에서 '예쁜 형태로 나온다 해도 경계할 생각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면서 남에게 그걸 요구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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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어째 말도 참 이쁘게 할꼬~^^” 흠… 약간 비꼬는 것 같기도 하다.
과연 말을 이쁘게 하는게 뭘까? 이쁘다는 외형묘사 ‘단어’와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말’이 만나서 자주 쓰이는 관용어구인데…
일단 확실한 것은 상대방에게 일말의 거슬림도 없어야 한다. 문제는 내가 뱉는 말 이외에도 외모나 냄새, 대화를 하는 장소의 소음, 악취조차도 거슬림이 없어야 우리는 ‘말을 이쁘게 할’ 수 있다. 만약에 명동 한복판,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인파들이 지나다니고 한달넘게 청소 안한 화장실 냄새가 풍기는 곳, 평소 맡아보지 못한 썪은 냄새를 풍기는 청결상태에 이질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이
“오늘같은 밤이면 그대를 나의 품에 가득 안고서 멈춰진 시간 속에 그대와 영원토록 머물고 싶어"
라고 말해도 과연 이쁘게 들릴까? 난 당신 품에 안기고 싶지 않아요. 당장 여길 벗어나 제 방 침대 이불속에 머물고 싶네요.
2 부_영어라는 렌즈
한국어의 감정 형용어 중 72%가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연구가 있을 정도로 우리는 나쁜 기분을 언어로 표현하려 애쓴다. 그중 노출 빈도가 가장 잦은 것들이 억울과 서운이다. 이를 영어의 부정적인 감정과 대응시켜 그 실체를 끝까지 파헤쳐보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우선 묻는다.
“억울했던 때를 떠올려보세요. 슬퍼요?” 예닐곱의 학생 중 일부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sad에 동그라미를 친다.
“그럼 화는 어때요? 화가 나요?” 아까보다 많은 학생들이 반응을 보인다. 나는 angry에도 동그라미를 친다.
“무서워요?” 다들 고개를 젓는다. scared는 해당 사항이 없다.
“좌절스러워요? 외로워요? 모욕당한 느낌이에요?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감정들을 더한다.
슬프고, 좌절스럽고, 화가 나고, 약간은 모욕당한 것 같은 느낌, 그 외에도 사실 각자에게 조금씩 다른 것, 우리가 합의하지 못한 이 거대한 부정적인 감정의 덩어리인 억울함.
우리는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예매하지 못했을 때에도 억울함을 느끼고 엄마가 동생에게만 컴퓨터 게임을 허락…(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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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빨래>의 주연 나영은 상사의 횡포에 아픈 마음을 주인집 할머니와 옆집 아주머니로부터 위로받는다(개인적으로 가장 극적인 씬이라고 생각한다). 나영은 울먹이며 그들에게 털어놓는다.
“억울하구요. 화가 막 나구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가장 잘 표현된 대사와 연기였다. 즉, 상사의 횡포가 나(혹은 나 외에도 공감했을 수많은 관객)에게 억울한 감정을 갖게 만드는 느낌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가가 아니기에 정확하진 않다. 더 복잡한 관계와 복잡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은 <빨래>란 뮤지컬이 우리에게 억울함을 전달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뮤지컬 속의 허구의 이야기는 공감을 타고 그렇게 현실이 된다. 보이지 않는 ‘말'은 수만가지 감정과 상황을 싣고 대도시를 공기처럼 떠다니며 우리에게 닿는다. 눈 비비며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 동네 밥 집에서 혼자 조용히 밥을 먹을 때, 관심도 없던 유명인사가 뉴스에 나오는 걸 기차역이나 식당에서 우연히 같이 볼 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알게모르게 교감한다. ‘너도 나와 같구나’ 혹은 무의식적인 한숨 같은 걸로 말이다. 뭐 꼭 한숨이나 부정적인 생각만 통하는 건 아니겠지만 아쉽게도 우린 나영과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 이제 그만 억울하고 싶은 그런 도시. 다양한 색이 떠오르는 도시였으면 좋겠다.
이제 한국어는 바깥 언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와 상호작용하며 진화한다. 외부에서 오는 도움은 언제나 처음엔 두렵지만 그 시기를 극복하고 잘 받아들이면 새롭고 더 나은 것에 도달할 수 있다.
감정을 언어화하고 더 나아가 두 언어를 오가며 그 감정의 스펙트럼을 시험해보는 일은 당신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의 소통에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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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한글을 익히려고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처지에 영어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언어권력과 사회 구조를 논하며 영어를 배제시키기엔 나만 도태되는 압박감이 너무 커서 서글프게도 패배를 인정했다. 그 뿐인가, 영상언어도 놓쳐서는 안된다. (유튜브 만세?!)
언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이다. 근래들어 소통은 로봇과 찐하게 계약을 맺었다.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기술과 속도는 불과 몇년만에 인간의 능력치를 능가했다.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AI가 제공하는 정보에 뇌를 노출 시킬 수 밖에 없다. 궁금한 생활 상식들을 더이상 주변 선배나 부모님께 물어보지 않는다. 아니, 궁금하기도 전에 포털사이트나 SNS에서 가르쳐준다. 예상치 못한 공급과잉 덕에 필터링 기술 또한 급격히 발달했다. 내가 좋아 할 만한 책과 영화는 펴보기도 전에 AI가 알고 있다. 미국이 멜팅 팟이라면 구글은 수만개의 멜팅 팟이 올려진 거대한 가스렌지와 같다. 영어를 잘하는 AI의 능력은 배가 된다.
인간의 감정은 AI의 정보에 맞춰 반응하기 까지 한다. 감정은 정보 유통 흐름에 합승한다. 전세계가 BTS를 보고 열광하며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보고 분노한다. 표면적인 이미지에 대한 감각적인 반응은 초연결적이다. 하지만 위 구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소통에 도움이 되는 언어의 진화'는 이런 유행적이고 기술의존적인 문화현상보다는 복합적이고 감정중심적인게 아닐까 싶다. 로봇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채 조연이 되어버린 감정과 소통은 점점 뒤쳐지고 있다.
엄마가 가르쳐주던 요리는 네이버 블로그에 있는 요리보다 맛이 없을 수도 있다. 부정확하기도 하다. 가끔은 레시피보단 얼마나 깨끗이 주변정리를 해야하는지 설교한다. 심지어 대충 가르쳐 줄 때도 많다. 마치 가르쳐 줄게 있냐라는 듯이 귀찮아 하며 말이다. 결국 끝나고 나면 제대로 배웠나 싶다. 기억에 남는건 ‘주변을 항상 깨끗하게 해라', ‘느그 외할머니는…’ 이 두개가 끝이다.
그래도 레시피 대신 듣는 위 두 마디는 대 서사시의 서막일 때가 많다. 엄마, 할머니 두 세대의 시간과 세상을 들으며 수없이 채소랑 그릇을 닦다보면 묘하게 엄마와 ‘소통' 하는 기분이 든다. 함께하는 시간도 늘어간다. 모두가 맛있어 할 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엄마와 나 두명이 만족하는 요리를 먹으며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아주 가끔은 엄마가 신이나서 가르쳐 준다!
저자와 같은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도 최근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영어를 접하고 배울 수 있다. 영어와 한글의 상호작용은 매우 강한 편이다. 조금 무섭고 놀라울 정도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상호작용의 혜택은 인류보단 AI에게 더욱 적합한 시대라는 것이다. 하찮은 닝겐인 나는 떠먹여 줘도 못먹을 정도로 느리고 댕청하다(물론 내가 겁나 느리긴 하다).
헛소리를 길게도 했지만 사실 책에선 내가 말하는 것과 다르게 정갈하고 깊이 있으며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만 문득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그리웠나보다.
“당신이 지금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지 않으면 불행한 노년을 맞게 될 것이다” 혹은 “지금 이 보험 상품에 가입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변을 당했을 때 매우 후회하게 될 것 이다” 같은 외부의 잡음들이 어느새 내게 내면화된 것은 아닐까?
인생의 위험들을 모두 감수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서 그것이 나를 질문하게 하는 것인지, 그래서 내가 답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겁에 질리게 만들어 더 이상의 생각을 닫게 shut down 만드는 것인지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중략)
그러니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불안하고 무섭다고 느낄 때는 공포가 인간의 역사 중 가장 오래된 감정 중 하나라는 것을 유념하자. 나를 겁주는 주체를 찾아 나서자. 원래는 무섭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무서워하도록 학습시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세상에는 공포로 돈을 아주 많이 버는 사업들이 존재하며 그래서 더 겁을 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공포가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상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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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어릴 적에(지금도 어리지만(?)) 무섭고 두려운 맘을 감추기 위해 저지른 무리수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가장 자주 저지른 것은 아무래도 거짓말인듯 하다. 당시엔 단순히 처한 상황에 대한 얄팍한 회피기였지만 결국 내가 혹시라도 얻게 될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이었을테다. 유년기엔 숙제를 안하고 학원을 땡땡이 친 날, 다 커서는 선택을 미루고 책임을 부정하며 집단에 피해를 줬을 때 같은 것들 말이다. 급작한 거짓말부터 나 자신에게 저지른 합리화까지 다양한 회피기를 썼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정작 내가 현실에서 내뱉을 지라도 생각을 닫고 현실을 부정하며 꾸민 언어이기에 허상이고 그 허상은 나 자신조차 허구의 세계로 이끈다. 어느새 무뎌진 현실감각은 거울을 쳐다봐도 돌아오지 않는다. 거울 속의 나는 이미 나와 다른 사람이다(요즘 거울들은 특히나 더 그렇다). 나를 마주할 줄 모르는 나에게 더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주변을 맴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나를 맡긴다. 구분할 필요도 없고 어려울 필요도 없이 감정에 휩싸인 채 시간을 담보로 여전히 거짓된 삶을 즐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공포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마냥 내 천성의 문제일거라 생각했지만, 아주 조금은 꼭 그렇게만 보지 않아도 될 거 같기도 하다.
반라의 미친놈을 목격한 십 대 여자아이들이 아직도 두려움과 불편함을 ‘짜증'으로 퉁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 짜증이나, 어떡하지? 나는 짜증이 나면 울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약하고 나긋나긋한 소녀이길 기대받는 성별 계급과 말대답 않고 성인이 시키는 대로 깍듯이 받들기를 기대받는 나이 계급이 합쳐지면 우리의 십 대 소녀들은 심리적인 학대에 가장 취약한 집단 중 하나일 것이다. 여자친구가 가장 무서울 때가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라고 묻는 순간이라며 우스개 삼는 어떤 남자들을 보면 그의 여자친구가 그간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적당한 언어를 찾느라 얼마나 애썼을지부터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에게 허락된 언어의 빈곤으로 좌절한 후 마지막으로 품었을 기대를 이해하게 된다. 그 기대의 정체는 상대방이 갑자기 자기의 입장을 찰떡처럼 헤아려주는 기적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세분화된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죄 짜증 나고 억울한 것으로 치고, 좋은 감정은 혼자 잠깐 행복해하면 된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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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에서 모 과학자가 말하기로는 인간은 말하는 능력이 끝없이 진화할 동안 듣는 능력은 전혀 발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나같은 머저리들은 남의 얘길 10분만 들어도 집중력을 잃는다. 아니, 10분도 길다. 그렇다고 말을 잘 하지도 못한다.
터프하기 그지없는 고향친구들을 만날 땐 어릴 적 편안함에 기대어 함께하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딱히 소통이 필요없는 소통이 가능하다. 그치만 사회생활 지인이나 친분이 애매한 대학동문을 만나면 숨막힐 정도로 어색한 순간이 동반된다. 저자가 말하는 여자아이들과 같은 갑갑함은 절대 아니겠지만 나같은 븅딱도 쬐~금은 대략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막상 말해놓고 보니 절대 모를 감정인거 같기도 하다. 이해한다고 자만하지 말자. 역겨우니까. 중요한건 저자가 말하는 여자아이는 아니더라도 타인을 대할 때 필수적인 것이 표현하고 듣는 행위라는 것은 확실하다.
지겹고 역겹고 어색한 내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탈피하고 싶은 욕구가 나날이 심해져서 할 수 있는게 무얼까 고민해봤다. 딱히 없었다. 책 읽기, 욕 안하기, 담배끊기(?), 술 줄이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네가지를 후벼팠다. 4가지 중 3개는 나름 성공한거 같은데 여전히 책을 본다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이제 11분 정도는 들을 수 있는 거 같아 초큼 뿌듯하다.
듣는다는 것은 소리에 입각한 행위다. 상대방에게 공감하려면 다른 무엇보다 듣고자 노력해야 한다. 화자의 표현이 완벽하지 못하고 2차적으로 우리의 듣는 행위가 취약하다고 가정한다면 소통의 정도는 반의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청자로서의 우리는 듣는 능력을 키우는게 중요하다.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듣는 행위는 수동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이다.
저자의 말대로 술을 먹고 잊는게 낫다고 여기는 소중한 사람이 주변에 있는가? 그렇다면 얼굴 양쪽에 귀가 달려 있는 나는 술보다 못한 존재인가? 적어도 난 타인이 술이나 마시고 싶어서 나를 찾기보다 나에게 얘기하는 시간이 좋아 술자리를 갖길 바라는 존재가 되고 싶다. 다음 날 잊더라도 말이다.
Arika Okrent가 지적하듯이 '기분은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언어와 문화가 강력하게 결합한 한국만의 무엇이다.* 한국어가 아니면 온전히 표현할 수 없고 똑같은 맥락으로 쓸 수도 없다. 우리가 영어로 알고 있는 타이어를 한국어로 고무바퀴라고 설명해도 뭔가 미진함이 남는 것과 같다. 외부인으로서 그가 이해한 ‘기분’은 mood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인간관계와 밀접한 무언가를 뜻하는 단어다. 이 세계에서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나의 지위가 얼마나 높거나 낮은지를 항상 인식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의 기분을 (알아서) 헤아리는 것은 단지 인간에 대한 배려를 넘어선, 그의 지위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기분 상하게 하지 마”라는 문장은 예의를 지켜달라는 뜻만도 아니고, 자기를 사랑해달라는 뜻만도 아니며, 자기가 누군지 알아달라는 것만 의미하지도 않는다. 내 기분과 그 기분을 결정하는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세상은 그 모두를 포함하게 된다. 나를 존중해줘, 나를 보살펴줘, 나를 읽어줘, 라는 말해지지 않은 무언가가 기분으로 수렴한다. 그래서 기분은 결국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때가 많다.
또한 감정을 '기분에 일임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여러 형태와 온도를 좋거나 나쁜 두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일직 선상에 가두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의 상태에 대해 제대로 소통하려면 때로는 기분 나쁘다는 것이 불쾌한 feeling offended 쪽인지 혹은 죄책감을 느끼는 feeling guilty 것인지 수치심을 느끼는 feeling ashamed 것인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생략)
*https://www.pri.org/stories/2015-06-17/orange-new-black-said-we-did-story-korean-word-kibun-so-now-we-have 2015. 6. 17.
- 147~148
가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보면 신기한 경험을 한다. 어떤 구절이나 장면에서 책이나 영화가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급속도로 유령 캐스퍼가 내 몸속에 들어오는 기분…? 무지하고 무감각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나조차도 그럴 땐 마치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는 것 같은…? 시신경-시냅스-뉴런-시냅스-온몸으로 퍼지는 과정을 고급 음향장비로 녹음해서 들려주는 것 같은…? 소름 같기도 하고.
단어로 ‘기분'을 읽은 것은 처음이다. ‘기분기분’거리지만 기분이 정작 무엇인지 우리가 알고 살았나? 정작 감정이라는 단어는 조금 과하고 진지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진지하게 느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가 기분을 세분화하는 내 자신에게 옹졸하게 구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사람 눈치보고 사는게 일상인 국민들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우물쭈물대다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감정을 기분으로 싸잡아버리는게 편한걸지도 모른다. 일상의 소중함은 감정보단 돈과 시간으로 귀결되니까. 우린 ‘내 언어' 처럼 보이는 ‘모두의 언어' 에 속고 살아라고 배워왔는지도.
척추에 힘을 주고 꼿꼿이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도 체육 선생님은 가끔 “똑바로 해라, 똑바로”라며 으름장을 놓고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똑바로' 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온몸을 긴장시키고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몸을 바로 세웠다고 확신해도 보는 사람이 마음이 들지 않으면 똑바르지 않은 것이었다. 똑바로 선 건지 확인하려는 시선이 나에게 와서 멎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댔다. 발을 모으고, 척추를 곧게 세우고, 팔은 가지런히 옆구리에 붙여 떨어뜨리고 가슴을 내밀고 고개는 치켜들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는 것이 똑바로 서기의 정의였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똑바로 선 자세의 정의는 지시하는 사람에 따라, 혹은 지시 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누군가 똑바로 서라고 하면 나는 일단 머릿속이 마구 엉키는 것 같았다.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고 서라거나 손은 주먹을 쥐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매번 설명해주면 좋을 텐데 나에게 똑바로 서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자세를 고칠 때마다 더욱 고조되는 긴장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십 년이 지나 전문가에게 운동을 배우고 나서야 나는 바로 서다stand straight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발바닥에 체중을 싣는 법부터 시작해 윗배를 당겨 넣고 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는 것까지 포함하는 매우 어려운 동작이었다. (중략)
그들은 정말 내가 바로 서기를 원하기는 했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똑바로 서라는 지시는 나에게 혼란과 좌절을 가져다주는, 일종의 정신적 구금을 알리는 구호에 불과했다. 내 몸의 통제권이 나에게 없음을 확인시키는 한마디였다. (중략) 말과 동작의 일대일 대응은 진작에 물 건너간 얘기. 희미한 적대감과 번개같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위계의 확인만이 남았다.
- 176~177
예전에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책정보)를 읽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우치다 다쓰루라는 학자를 알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일본의 훈육과 체벌 방법은 매우 훌륭한 구조주의의 작동 사례였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체벌 방식이 매우 교묘(?)하다. 벌을 주는 듯 벌을 주지 않는 듯한 자세를 통해 간접적 불편함이 몸에 스며들게 되고 그로 인해 우리 몸은 복종의 능력을 슬며시 장착하게 된다. 위 ‘똑바로 서는 법' 과 비슷한 얘기인 거 같다.
‘전체~ 차룟!’ 에 매우 능숙한 아이였던 나는 왜 똑바로 서있기를 잘했을지 고민해봤다. 물론 몸을 자주 안 움직이고 어깨가 잘 펴진다거나 등이 굽지 않았던 것도 한 몫을 했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윗사람 눈치를 보며 ‘알아서 기는' 듯 한 스탠스에 능했던 것 같다. 감시자가 다가오면 알아서 부동자세에 긴장감을 가득 담아 ‘저는 명령과 시스템에 순종하고 있어요' 라고 몸으로 말했다. 조금 오반가…? 모르겠다. 적당한 단어와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편 똑바로 서는 것은 똑바로 사는 것과 같은 궤를 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한다. 과도한 위계를, 압력을 과시하는 윗사람들의 행위는 나에게 ‘복종만이 살 길이다' 라고 말하는것 같다. 단지 살아야 한다는 이유가 만들어낸 억척과 무통은 윗 세대의 특징인 듯 하다. 그렇게 따져보니 우리 부모들은 조부모 세대의 우선적인 공포요소로부터 보호받았다. 그 공포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허튼 생각말고 엄마손 꼭 붙들고 있어.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진짜 큰일나" 라고 말하는 모습이 엉성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내일까지도 비가 올지 궁금하다면 한국어는 어떻게 질문할까? “내일도 비 와?” 혹은 “내일 비가 올까?” 라고 묻지 “내일 비가 올 것이니?”라고 묻지 않는다. 뻔히 보이는 위험 앞에서 장난치는 사람에게 “너 그러다 큰일 난다” 라고 경고하지 “너 그러다 큰일이 날 것이다”라고 굳이 미래 시제를 강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제 개념을 대입해 봤을 때 우리말은 현재 시제가 미래 시제를 대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UCLA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키스 첸 Keith Chen은 '언어와 경제적 결정 간의 상관 관계'에 대해 연구하다 매우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는 서로 다른 여러 언어와 문화, 인종과 경제 상황에 처한 76개의 OECD 가입 국가를 조사하였고 그 결과 영어처럼 '미래 시제가 엄격하게 구분되는 언어와 문법상 현재와 미래에 차이가 없는 언어 구사자 사이에 현격한 저축율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futured language, 즉 미래 시제를 가진 언어(영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등)의 구사자들은 저축율이 낮고, futureless language, 미래 시제를 가지지 않은 언어(북경어, 일본어, 핀란드어 등)의 구사자들은 저축율이 높았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남한의 저축순위는? 연구 당시 76개 국가 중 저축율이 2위였다.
첸은 여기에 대해 “미래 시제를 현재와 엄격히 구분해 쓸 경우 현재와 미래가 멀리 떨어진 것으로 보는 반면, 현재 시제가 미래 시제를 대체하는 언어는 미래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에 의하면 미래 시제가 확실히 존재하는 언어권 사람들은 언어가 지배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미래를 현재와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은 오늘의 삶을 즐기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는 삶의 태도에 거부감이 덜하다. 반면 현재 시제가 미래 시제를 대체하는 언어의 사용자들은 미래가 이미 현재와 다름없이 다가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다음은 또 어떻게 되지? 확실히 알 수 없나?'라는 사고의 흐름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미래는 곧 현재이기 때문에.* (생략)
* (Could your language affect your ability to save money?), Keith Chen, TEDGlobal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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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어를 잘 몰라서… 시제, 참 어렵당...흠… 어쨌든 “덜 불안하게 현재를 즐기는 사람들과 시제의 관계” 를 골자로 한 이야기 같다. 결국 누가 더 지금 행복한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아도 되겠다.
사실 시공간은 자가행복도 진단에 큰 영향을 준다. ‘자가' 를 붙이기엔 당연히 행복은 주관적 측정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체감 할 수있는 공동체나 집단영역에서 타인과 상대적 비교가 가능한 다양한 지표가 측정 요인이 되곤 한다. 대표적으로 물질, 재산의 양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행불을 쉽게 재단할 수 있는 요소로 쓰인다.
위에서 이야기하는 ‘시제'는 개인적으로 이해력이 떨어지는 댕청이라 어렵게 느껴진다. 다만 행복에 대한 이야기이고 시제와 시간의 관련을 따졌을 때, ‘행복을 측정하는 지표로써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되려나? 그렇다면 우리는 물질대신 시간을 대입해도 되지 않을까? 바꿔말하면 시간의 가치(양, 질 등)에 대한 상대적 비교를 통해 우리의 행복도는 달라질 수 있다는 건가?
그러면 또! 한번 더 바꿔 말하면 외국어 중 미래시제 사용법이 우리와 확연히 다른 언어를 배운다면 우리의 행복도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뜻…? 아몰랑
물론 책에선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양한 사례가 제시되어 있으니 꼭 필독하길 권한다. 내가 고민하는 것을 되짚어보자면 이렇다. 우리는 재산처럼 시간을 ‘양' 으로 따지는 것 같다. 주어진 일을 해 나갈때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면 불안감을 느낀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다가올 순간이 가까워 졌다는 것이고 이는 현재의 연장으로 여겨지기 쉽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시제는 시간을 역전한다. 가깝지 않은 시기에 대한 얘기도 현재시제로 대화할 시에 가깝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궁금한 것은 “왜 우리는 미래시제 사용이 적을까?” 책에선 다양한 힌트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책을 읽자...(뜬금 마무리)
휴… 언어와 나의 관계라니… 굉장히 굉장한 이야기 같다.
최근 ‘성적 수치심' 의 무분별한 사용과 적법절차를 위한 차별적 명시가 문제 되고있다. 우린 여기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단어와 법, 감정과 법은 결국 강한 유기성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족한 어휘력과 감수성으로 발버둥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살고 있다.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을 통해 단 한번이라도 내 감정을 돌아보고 내 언어를 고쳐볼 수 있음에 너무 감사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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