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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책 읽어?

<페스트> 알베르 카뮈

생각은미천하고살은찐다 2020. 7. 27. 17:04

#페스트 #알베르카뮈 #신촌저녁독서모임

 

*읽은 뒤 기록하고 싶은 구절과 감상을 적습니다. 책에 대한 설명은 두서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랩을 하던 아웃사이더. 음… 잠깐 라떼를 시전해도 되려낭? 뭐 아무도 안 읽을테니 상관없겠지.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무브먼트가 흥하고 가리온이 최고이던 시절. 더콰이엇이 다크호스이고 딥플로우 실물은 상상도 안해본 그런 시절. 힙합엘이는 있지도 않았고 힙합플레이야가 최고이던 시절. 무신사 스토어는 커녕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커뮤니티에 불과한 시절. 나매가 뭔지 아는가?

하찮은 시골 간지추종자로 남북 분단국가에서 이스트 웨스트 외치며 다녔다. 그렇게 권총 대신 아이리버와 함께 성장하던 내 ‘힙합찐따력'은 성인이 된 후 방탕한 자유에 밀려났다. 조심스레 생존신고를 한 건 언제부턴가 노래방에서 한두놈이 부르던 아웃사이더의 <외톨이>이 덕분이었다.

빠르다고? 그래 겁나 빠르긴 하더라. 무시무시한 속도로 전국에 퍼졌다. 바이브, 버즈가 가고 아웃사이더가 왔다. 전국 남학생들 모두 접신한 상태였다. 후… 지금 다시 생각만해도…ㄷㄷ

2020년 올해, 더 무섭고 빠른 페스트가 왔다. 모두가 입을 가린채 산다. 반강제적으로 진정한 아웃사이더가 되고 있다. 하지만 <페스트>를 1주일 만에 읽기엔 넘나 느린 내 독서 속도...

 

*모임은 6월 9일 신촌 카페에서 5명이 모였다. 책을 다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모인 것만으로도 ㄱㅅ.

 


<페스트 La Peste>  알베르 카뮈 (1947)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해 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 다니엘 디포

 

 

머가리가 비어있는 1인으로서 비유, 은유, 풍자는 넘나 어렵다. 하지만 대략 난독 후 이해 했다고 합리화하자면 이런 얘기다.

내 인생 감옥살이 ㅇㅈ? 높으신 분 말에 의하면 우리는 ‘개,돼지' 이기에 감옥살이 맞음( <고기로 태어나서> 를 읽으면 개, 돼지들은 감옥에 산다는 것이 옳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내 감옥살이를 유명한 범죄자 겸 연예인 감옥살이에 빗대어 표현해봄. 예를 들어 걔네는 인간 말종 짓을 하고 멜론차트 1위도 해본 그런 패배자이자 승리자인 애들임.

난 클럽 투자를 받을 능력도, 약국이 보호해줄 이유도 없는 ‘개돼지'에 불과함. 그치만 만약에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능력과 보호를 받는 사람이 된다면? 흠…

여전히 개돼지이고 감옥살이 중임. 고로 난 쓰레기다. 합당한가? 그렇다. 

10년 뒤에 다시 읽고 적어봐야겠다.

 

 

 


1부


 

(생략)

 그러나 오랑에서는 지나치게 거센 기후, 거기서 거래하는 사업의 중요성,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황혼, 쾌락의 특질 등 모든 것이 한결같이 건강한 몸을 요구한다. 이곳에서 병을 앓는 사람은 아주 외롭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시간에 전화를 붙잡고서, 혹은 카페에 앉아서 어음이니 선하증권이니 할인이니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더위로 불꽃이 튀기는 듯한 수많은 벽들 뒤에서 덫에 걸린 채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중략) 마땅히 강조해 두었어야 할 것은 도시와 일상생활의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일단 습관을 붙이고 나면 그날그날을 힘들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법이다. 우리의 도시가 바로 그런 습관 붙이기를 조장하는 터이고 보면 만사형통 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삶이란 아주 흥미 진진한 것은 못 된다. 적어도 우리 고장에서는 무질서라는 것을 모르고 지낸다. 솔직하고 붙임성 있고 활동적인 우리 주민들은 여행자들의 마음속에 늘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남겨 준다. 눈길을 끌 만큼 특이한 것도 없고, ‘초목도 없고 넋도 없는' 이 도시는 마침내 푸근한 인상을 주기에 이르러, 결국 사람들은 거기서 잠이 들어 버린다. (생략)

- 1부 14

 

 

카뮈 선생님 서울도 와보신줄…

이라고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반대다. 서울은 진작 <페스트> 1부 만이라도 읽었어야 했다. 강남 3구 큰 카페를 가보면 옆테이블 얘기가 굳이 듣기 싫어도 심심찮게 들린다.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어디서 그렇게 큰 목소리와 자본을 얻으신건지 모르겠지만 ‘억' 소리가 툭하면 오고가더라. 슬그머니 귓속으로 파고드는 바이러스 같은 숫자소리를 미쳐 막지 못하다 보면 

‘혹시 내가 덫에 걸린 죽음의 감염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숫자들을 갖지 못한 채 보균자들에게 감연되고 만.

흥미진진하게 무질서를 찾아 나설 용기도 놓쳐버린 나에게 알선생님은 무엇을 권하는 것일까.


 

(생략)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생략)

- 1부 55

 

 

아ㅏㅏ…알선생님의 통찰력…

어리석은 것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으며 어리석음을 탓하지만 결코 어리석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시니

자연스레 없던 겸손조차 흩날리던 반성과 후회로 점철되옵니다. 헌데 선생님 그거 아십니까? 선생님이 말씀하신 ‘휴머니스트' 는 어느새 자본과 함께 무럭무럭 자란 인공적이며 기능우선적인 ‘포스트 휴먼' 들에게 조금씩 밀려나고 있습니다. 물론 휴머니스트가 포스트 휴먼을 애지중지하며 열심히 키웠더랬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같은 이들이 곧 ‘휴머니스트' 가 되는 날이 머지 않은 듯해요. 한번 놀러오시면 깜짝 놀랄 거에요. 정말정말 재미없지만 재밌는 세상이랍니다.


 

 

(생략) 의사 리유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리창의 저편에는 봄의 신선한 하늘이 떠 있었고 그 이편에는 아직도 방안에서 반향하고 있는 ‘페스트'란 한마디 말이 있었다. 그 말은 과학이 그 속에 담고자 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일련의 예외적인 이미지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미지들은 이 시간이면 적당하게 활기를 띠면서 요란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낮게 윙윙거리는 그 도시, 그리고 만약에 인간이 행복하면서 동시에 침울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결국 행복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 누렇고 뿌연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시의 그토록 평화스럽고 무심한 고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무서운 전염병의 해묵은 이미지들은 손쉽게 지워져 버리는 것이었다. (중략) 오직 바다만이 이 세상 속에 있는 불안하고 결코 휴식하지 못하는 그 무엇을 증언해 주고 있었다. 그때 리유는 물굽이를 바라보면서 루크레티우스가 말한 바 있는, 페스트에 휩쓸린 아테네 사람들이 바다 앞에 드높이 세워 놓았다는 화장터의 장작더미들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밤에 그곳으로 시체들을 옮겼는데 자리가 모자라서 산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이 아끼는 이들의 시신을 그곳에 갖다 놓으려고 횃불을 휘두르며 다투었고, 자기들의 시체를 포기 하느니보다는 피투성이가 되면서라도 싸워 이기려고 했다. 고요하고 어둠침침한 바다 앞에서, 벌겋게 타오르는 모닥불 화장대, 가만히 굽어보고 있는 하늘로 빽빽이 솟아오르는 독기 서린 김과 불꽃으로 번뜩이는 어둠 속에서의 횃불 싸움, 이런 것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두려운 것은....... 

 그러나 이 현기증 나는 상상도 이성 앞에서는 계속되지 못했다.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이 순간에도 재앙이 희생자 두서넛을 후려쳐서 쓰러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거야 뭐 중지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해, 드디어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 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페스트가 멎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머릿속에서의 상상, 머릿속에서의 그릇된 상상이 아니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선은 그에 대비하는 조처를 취하고 다음으로는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있는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의사는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가의 소음이 대뜸 커졌다. 이웃에 있는 어떤 공장에서 기계톱의 짧고 반복되는 소리가 싸각싸각 들려왔다. 리유는 머리를 흠칫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 이었다. 거기서 멎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었다.

- 1부 57 ~ 60

 

 

옥탑방과 반지하 중에 굳이 더 나은 것을 고르라면… 시선의 권력구조 상 옥탑의 자유로움으로 인해 반지하보다 옥탑방이 낫다고 볼 수 있다. 쩌는 더위 속에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한 손 풋져핸접 지하철이라도, 썩은 하수구 냄새 제치고 존재감 드러내는 담배연기 속에서라도, 그런 서울에서도 드론샷이 주는 아름다움은 환상을 품게 한다. 문득 갖게 되는 여유와 함께 다가온 심미안은 현실을 벗어 던지고 상상 속에서 벅차오른다. 발거벗고 하늘을 날아보자. “어 홀 뉴~ 월드”, “자유롭게~ 저 하늘을~”. 머릿 속 BGM은 바람소리를 오케스트라로 심포니 3악장 그 이상의 웅장함을 연주하고… 바로 그 순간 알람이 온다. 월세날, 대출이자, 각종 공과금, 폰, 인터넷값 등등등…

코로나는 현실일까? 솔직히 아직 지인 중에 확진자를 본 적은 없다. 무너지는 하루하루가 부담스럽기만 한 지금의 상황이 그저 현실 같지 않을 때가 많다. 뭐, 언제나 상상속에 살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 진짜 힘들어도, 진짜 웃겨도, 진짜 사랑해도 진짜를 진짜 이성적으로 고민하다보면 또 지나가던 담배연기가 내 코를 찌른다. 바닷가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주검을 태우기 위해 자기 목숨 내놓고 칼싸움하는 아테네 시민들은 진짜가 뭔지 알았을까?


 

 

(생략) 리샤르는, 무엇이건 어두운 쪽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며, 게다가 자기 환자들의 가족이 아직 무사한 것을 보면 사실 전염성도 확실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딴 사람들은 죽었는걸요.” 하고 리유가 지적했다. "그리고 물론 전염성이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았다가는 무한한 산술적 증가와 무시무시한 인구 감소가 생겼을 테지요. 절대로 어두운 쪽으로만 보자는 게 아닙니다. 예방 조치를 취하자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리샤르는 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병 자체가 저절로 멈추지 않는 한 법률에 규정된 중대한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자면 그 병이 페스트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확증이 절대적이지 않은 이상 심사숙고가 필요하다는 것 등을 지적함으로써 사태를 요약하려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하고 리유가 고집했다. “법률에 규정된 조치가 중대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도시 인구의 반수가 목숨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조치를 내려야 하느냐 아니냐를 알자는 것 입니다. 그 밖의 것은 행정적인 문제인데, 바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라고 현행 제도는 도청의 지사직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고 지사가 말했다. “그러나 우선 여러분이 공식적으로 그것을 페스트라는 유행병으로 인정해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생략)

- 1부 72

 

 

우리는 이제서야 ‘인정'의 힘을 안다. ㅇㅈ, ㄴㅇㅈ, ㅇㅇ나만ㅇㅈ 등등. 과거 조상들은 ㅇㅈ을 인정할 줄 몰랐다. 사람이 정이 있어야지. 동의를 구하는 행위는 조금 소모적인 듯 보여도 큰 동력을 만든다. 만약 노ㅇㅈ 의 힘이 크다면? 인정욕에 생각이 휩싸여 사고체계가 멈추어버린 채 혼자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그락불그락해지는 순간이 온다. 누가 그러냐고? 내가 그렇다. 그래서 나는 꼰머다. 요즘 애들에겐 ‘ㅇㅇ 나만 ㅇㅈ’ 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가막힌 신조어는 천만명이 모여 사는 대도시에서 반드시 필요한 말이다. 세상 부러운 능력이다. 20년 뒤에 ㅇㅇ 나만 ㅇㅈ을 외치는 친구들이 시장이 된다면 어떤 세상일까 궁금해진다.


 

“딴 사람들이라뇨?” “딴 놈들 모두하고 말이에요."

 

그랑은 그 담배 가게 여주인이 있는 데서 기이한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한참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여자가 알제에서 한창 떠들썩하던 당시의 어떤 체포 사건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어떤 상사의 젊은 사무원이 바닷가에서 한 아랍인을 죽인 사건이었다. (중략)

 그 뒤에, 그랑은 그 밖에도 코타르의 또 다른 성격 변화를 리유에게 알려 주었다. 코타르의 의견은 언제나 아주 자유주의적이었다. 그가 즐겨 쓰는 '작은 놈은 항상 큰 놈에게 먹히게 마련이다'라는 말이 그것을 잘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그는 오랑의 온건파 신문밖에는 사보지 않게 되었고, 게다가 공공장소에서 읽는 것을 어딘지 우쭐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까지 되었다. 또한 병석에서 일어 나고 며칠 후, 그는 우체국에 가려던 참인 그랑에게, 멀리 떨어져 사는 자기 누이동생에게 매달 보내고 있는 백 프랑짜리 우편환을 좀 부쳐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랑이 막 나가려는 순간, “이백 프랑을 보내 주세요.” 하고 코타르가 부탁했다. (생략)

- 1부 79

 

 

<이방인>은 사실 뭔 얘기인지 도통 모르겠다. <페스트>도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확실히 바다와 알제리, 프랑스, 죽음. 이 네가지가 알선생님의 핵심 템인 듯 하다.

 

 

 


2부


 

(생략) 그러니 전보만이 우리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해와 정과 살로써 맺어졌던 사람들이, 이제는 겨우 열 마디 정도가 고작인 전문(電文)의 대문자 속에서 그 옛정의 흔적을 더듬어 보게끔 되었다. 그리고 사실, 전보에서 쓸 수 있는 문구들은 곧 바닥이 드러나고 말기 때문에, 오랫동안의 공동생활이라든가, 공통으로 품고 있는 애욕 같은 것들이 '잘 있소, 당신을 생각하며, 사랑하오.' 같은 상투적인 문구의 정기적인 교환으로 급속히 축소되고 말았다. 

 우리들 중 몇몇은 그래도 악착같이 편지를 써 가지고 외부와 통신을 하려고 끊임없이 여러가지 수단을 궁리해 보았으나 결국은 실없는 짓이었음을 깨닫고 마는 것이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해 낸 방법 중 몇 가지가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답장을 받을 길이 없으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여러 주일 동안, 우리들은 같은 편지를 끊임없이 다시 쓰고, 똑같은 호소의 말을 다시 베껴 쓸 수밖에 없게끔 되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 나와 피가 뜨겁도록 흐르던 말들이 의미를 잃어버린 채 텅 빈 것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 2부 95

 

 

<연필 깎기의 정석>을 내가 왜 읽었는지 다시한번 되새겨본다. 쓰기 위해서일까? 확실한 건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같이 단어 하나 하나에 우리 곁의 공기, 소리, 냄새까지 꾹꾹 담아 낼 능력이 없으므로 연필을 깎을 줄 아는 정도로 만족해야 겠다. 연필이 깎였는가? 그렇다면 쓸 생각말고 연필을 잘 보관하자. 그게 세상을 위한 일이다. 대신 텅텅 비어있는 언어로 세상을 가득채워보자. 그러면 오히려 페스트 시대의 언어처럼 코로나를 우리 맘 속에 새길 수 있지 않을까?


 

그 가정은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행복의 예를 보여 주는 그러한 가정 중 하나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모든 가능성으로 보아서, 그 부부는 여태껏 자기들의 결혼이 만족스럽다는 확신조차 없이 살아왔다고 서술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시작된 별거 생활이 끝날 줄 모른 채 연장되면서부터 그들은, 서로 떨어져선 살 수 없으며, 백일하에 문득 드러난 그 진실에 비긴다면 페스트 같은 것은 하찮은 것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었다.

(중략) 우리들의 생활을 이루고 있던 감정, 더구나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감정(오랑 시민들은, 이미 말 한 바 있듯이 단순한 정열의 소유자들이다)이 전에는 몰랐던 새 로운 면모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배우자를 퍽 끔찍하게 믿어 오던 남편들이나 애인들이 문득 질투심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었다. 사랑을 가볍게 여긴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던 남자들이 다시 성실해졌다.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도 거의 어머니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관심하게 살던 아들들이, 그들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 하나에도 자기들의 모든 불안과 후회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중략) 우리는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 우선 우리 자신의 고통과, 다음으로는 집에 없는 사람들, 즉 자식이며, 아내며, 애인이 겪으리라고 상상되는 고통이었다.

- 2부 97

 

 

위에 ‘부부'는 늙은 의사와 그의 부인을 말한다. 둘은 서로의 사랑을 부재로 확인한다. 부재로 확인된 사랑은 기어코 실제로 함께 해야하는 과정으로 진행이 될까? 아무생각 없이 읽을 때는 오히려 우와 멋있다 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과연 저게 맞는 걸까? 그정도의 욕구만이 사랑인가? 어렵다.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지 못함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순간이 하필이면 페스트가 창궐한 시기라면, 나는 무엇으로 일상을 지킬 것인가?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늙은 부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 


 

(생략)

 그 불행은, 우리로서는 분노를 금치 못할 그 부당한 고통을 우리에게 끼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괴로워하도록,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 그 고통에 동의하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면서 그 저의를 은폐하는 이 질병의 상투적인 수단들 중 하나였다. 

 이처럼 우리들 각자는 그날그날 하늘만 마주 보며 고독하게 살아가기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 전반적인 포기 상태는 결국에 가서는 사람들의 성격을 단련할 수도 있었으련만 오히려 사람들을 줏대 없게 만들어 놓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몇몇 시민들은, 해가 나거나 비가 오면 그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또 하나의 노예 상태에 빠져 버렸다. (중략) 몇 주일 전만 해도 그들은 그러한 허약함이나 어처구니없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들 혼자만이 고독하게 세계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그들의 우주 앞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반대로 이제부터 그들은 아무리 보아도 하늘의 변덕에 좌우되는 형편이 되고 만 것 같았다. 즉, 그들은 까닭 없이 괴로워하거나 까닭 없이 희망을 품는 것이었다. 

 그러한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 아무도 이웃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고 제각기 혼자서 저마다의 근심에 잠겨 있었다.

- 2부 103

 

 

사실 알선생님처럼 코로나의 저의를 생각해볼 만큼 머리가 좋지 못하니 그저 두루뭉실하게 와닿을 뿐이다. 다른 이슈로 이야기 화제를 돌리는 수법 같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인지부조화, 언행불일치 같은 느낌으로 와닿는 위력이다. 위험한것 같지만 잔잔한, 해결할 수 없지만 해결해도 달라지지 않을 듯한. 안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어색하고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대한 반항은 도대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찮은 생각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사고로 즉, 인위적으로 무위자연의 존재를 정의내릴 수는 없다. 모든 것은 부분 부분 인위적인 요소를 무조건 포함할테지. 도시의 매력은 인위적인 자유(인간의 자유의지 능력)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도시의 정지로 인해 우리가 느낄 억압은 인위적인 것일까 자연적인 것일까. 대부분은 익숙함에 의한 부자연스러움을 인위적인 것으로 오해할 것은 분명하다.


 

만약 우리들 중 누가 우연히 자기 내심을 털어놓거나 모종의 감정을 말해도,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대답은 어떤 종류건 간에 대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상대방과 자기가 서로 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오래 두고 마음속에서만 되씹으며 괴로워하던 끝에 그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그가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 한 이미지는 기대와 정열의 불 속에서 오래 익힌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상대방은 습관적인 감동이나 시장에 가면 살 수 있을 상투적인 괴로움이나, 판에 박힌 감상 정도로 상상하는 것이었다. 호의에서건 악의에서건 그 응답은 언제나 빗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더 이상 침묵을 견딜 수 없게 된 사람들의 경우, 남들이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쓸 줄 모르게 된 이상, 자기들도 결국 시장에 굴러다니는 말을 쓰고, 그들도 역시 상투적인 방식으로, 단순한 이야기나 잡보, 이를테면 일간지 기사 비슷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마는 것이었다. (생략)

- 2부 104

 

 

흠… 알선생님… 아무래도 선생님은 지금 서울에 살게 되신다면 라떼가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여기선 기대와 정열의 불 속에서 오래익힌 이야기를 했다간 투 머치 소리 들을테니까요...


 

그리고 랑베르가 그에게, 자기는 새벽 4시에 잠에서 깨어나 자기의 도시를 생각하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날, 의사는 이내 그가 두고 온 여자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서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과연 그가 그 여자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었다. 보통 새벽 4시까지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비록 배반의 밤이라 하더라도 그때는 모두들 잠을 잔다. 그렇다, 그 시간에는 모두들 잠을 잔다. 그리고 그것은 안도감을 준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끝없이 소유하고 싶다거나, 또는 한동안 헤어져 있어야만 될 경우 다시 만나는 날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깨어나지 않을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 빠뜨려 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것이 안심 못 하는 마음의 가당찮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 2부 148, 149

 

 

새벽 4시는 도시가 살아나는 시간이다. 할증이 풀리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내가 집을 사면 그건 은행 것인 것처럼.


 

 

보건대에 헌신한 사람들은 사실 그 일을 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대단한 칭찬을 받을 처지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해야 할 일이 그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은 것이야말로 그때 처지로는 오히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건대는 우리 시민들이 페스트 속에 더 깊게 파고 들도록 도와주었으며, 시민들에게 부분적이나마 질병이 눈앞에 있으니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납득시켰다. 이처럼 페스트는 몇몇 사람들의 의무로 변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본연의 실체, 즉 모든 사람의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교사가 둘에 둘을 보태면 넷이 된다고 가르친다고 해서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가 그 훌륭한 직업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찬사를 던지는 것이리라. (중략) 그러나 또한 그러한 선의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 교사나 그 교사와 똑같은 마음인 모든 사람과 공통된다는 것도 말해 두자. 그런데 인간의 명예를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세상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수가 많으며, 적어도 그것이 서술자의 신념이다. (생략) 문제는 둘에 둘을 보태면 과연 넷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자기네의 생명을 내걸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들이 페스트 속에 있느냐 아니냐, 페스트와 싸워야 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었고 그들은 그 해답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략)

- 2부 177, 178

 

 

보이지 않는 코로나가 실체를 드러낸 것은 현미경 덕이다. 작고 동그란 녀석의 모습을 보고 코로나라고 칭하면서 코로나는 코로나가 되었다(?). 쥐가 사라지지 않아도 많은 인구가 죽지 않아도 우린 코로나를 알 수 있다. 5천만 인구가 사는 나라에서 1만명이 걸리고 300여명이 죽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5천명이라면 그 중에 1명이 전염되고 그 한명이 죽을 확률은 3퍼센트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선 그렇다. 코로나를 코로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의무 덕이었다.

물론 평상시에는 다르다. 보상과 벌의 줄다리기 속에서 일상이 이어지기에 그들은 보상을 바라고 벌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보상과 벌의 간극은 없을 수도 있다. 과잉진료, 의료사기, 상업적 진료 등. 무엇이 옳을까?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함으로 평상시에는 열심히 호갱이 되어주기도 하고 치료를 받기도 하다가 지금 같은 위기 상황일 때 그들의 의무를 태연하게 받아들이면 되려나?

여튼 지금 고생하시는 수많은 의료종사자 분들이 너무 감사한 건 확실하다. (_ _)


 

(생략) “두 분께서는 아마 그런 모든 일에서 조금도 손해 보실 것이 없을 겁니다. 유리한 편에 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니까요." 리유는 자기 잔을 비웠다. “자.”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에겐 할 일이 있어서요."

그가 나갔다. 

타루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나가려는 순간에 막 생각 이 난 듯이 신문기자에게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리유의 부인이 여기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에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랑베르는 뜻밖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타루는 이미 나가 버렸다. 이튿날 꼭두새벽에 랑베르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이 도시를 떠날 방도를 찾을 때까지 함께 일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잠시 저쪽 수화기에서 침묵이 흐르더니 이윽고, “좋아요, 랑베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들려왔다.

- 2부 217

 

 

좀 오그라든다. 오그라들 수 있는 감정이 있다는 건 아직 여유로운 것일까? 그치만 카뮈가 진지한 사람인 것은 확실한듯.

 


3부


 

(생략) 서술자는 여기서 예컨대 옛날이야기에서 나오는 그것처럼 용기를 북돋워 주는 영웅 이라든가 빛나는 행동과 같은, 아주 굉장한 구경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소개할 것이 없으니 얼마나 유감스러운지 모르겠다. 그 까닭은, 재앙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구경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다. 페스트는 그 병이 유행하던 초기에 의사 리유를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페스트는 무엇보다도 용의주도하고 빈틈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사무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디 삽입해서 말하자면, 아무것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서술자는 객관성이라는 것을 고집해 왔던 것이다. 서술자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필요성에 관한 것들 이외에 예술적인 효과를 위해서 무엇이건 덧붙이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객관성 자체가 서술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요구한다. 즉, 그 시기의 커다란 고통, 가장 심각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고통은 바로 생이별의 감정이었으며 페스트의 그 단계에 나타나는 생이별의 감정에 대해 새로운 기록을 남겨 놓는 것이 양심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당시에 있어서 고통 자체는 그것의 비장감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 3부 236

 

 

라고 말함으로서 서술자는 영웅적이지 않게 적은 이야기가 매우 영웅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페스트>는 위와 같은 부분을 읽을 때면 지그시 눈을 돌리게 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많은 현대인들이 오그라드는 감정에 대하여 견디지 못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고민해보자. 우선 디룩디룩 난 왜 이렇게 살이 쪘을까... 그리고는 심장을 찾아보자 두꺼운 지방벽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없겠지만 아주 얕은 맥박 파동이 느껴질 것이다. 가마니 생각해보면 조금 신기하다. 왜 뛰고 있지? 얘가 뛰어야 우리가 이렇게 개소리도 하고 존맛탱 위즐 칙촉도 먹고 책도 먹, 아니 읽는다. 그런게 아닐까? 내가 갖는 심장에 대한 고마움을 카뮈는 서술자에게 느끼고 있는게 아닐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잘 가는 문단이기도 했다. 무던한 위기는 아무리 긁어도 간지러운 등과 같다.


 

 

(생략) 페스트에 온통 자신을 맡겨 버린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으며, 이 기간 전부가 하나의 긴 잠에 불과했다.

도시는 눈을 크게 뜬 채 잠자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들이 실제로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 보는 것은, 오로지 겉보기에는 다 아문 것으로 보이던 상처가 한밤중에 돌연 다시 쓰라려 오는 그 드문 순간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벌떡 일어나, 일종의 방심 상태로, 그 도진 상처의 언저리를 어 루만지면서, 갑자기 다시 생생해진 그들의 고통을, 또 그것과 더불어 그들의 사랑의 간절한 표정을 한 줄기 섬광 속에서 다시 찾는 것이었다. 아침이 되면 그들은 다시 재앙 속으로, 즉 습관적 삶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생략)

- 3부 241

 

 

한때 흡연을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다. 새벽에 도지는 멍~ 띵~한 알수 없는 공허한 외로움을 아무도 없는 학교 광장에서 해를 품은 듯이 빛을 뿜어내는 달을 보며 후 하 후 하 담배로 채우던 그런 시기. 혼자 작업하던 일이 많던 내게 새벽 3-4시는 그런 시간이었다. 뭔가 하던 일을 멈추고 벌떡 나가 ‘한 줄기 섬광 속에서' 열심히 쓰다듬는 느낌적인 느낌의 시간.

사람이 좋아서 시작한 취미이자 공부였다. 자신감도 용기도 없는 내게 문득 눈에 들어온 한 줄기 분홍빛은 오묘한 손짓을 불러 일으켰다. 빛을 만지고 싶어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기억이 새벽의 외로움으로 이어졌다. 너무 좋아서 너무 외롭던 그런 묘한. 

그렇게 해가 뜬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밥을 먹고 술도 먹고 그렇게 달이 진다. 거나하게 취해 온 몸에 극심한 고통은 개뿔, 온몸을 옭아매는 거짓된 빛 속에서 거짓된 고통으로 삶을 즐긴다. 죄책감조차 형광빛으로 합성된 작위적이고 합리적인 감정이다. <Another earth> 결말을 나에게 빌려준다면 당장이라도 거푸집 속으로... 먼말이냐면 오히려 외롭게 작업하던 새벽이 알 선생님 말대로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느낌과 비슷했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여튼 <페스트>가 이렇게 또 추억여행을 시켜버리네. 이렇게 자위했으니 어디가서 라떼 시전을 덜 할 수 있을 것 같다.

 

 


4부


 

대개의 경우에 맺히고 딱딱해지고 메말라 있던 감수성이 때때로 풀어져서, 걷잡을 수 없는 감정 속에 리유를 몰아넣곤 하는 것이었다. 그의 유일한 방비는, 그 딱딱한 상태 속에 피신하여 자신의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그 매듭을 다시 한 번 단단히 졸라매는 것이었다. (중략) 그의 역할은 진단하는 일이었다. 발견하고 보고 기록하고 등록하고, 다음에 선고를 내리고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내라는 여자들은 그의 손목을 쥐고 울고불고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 사람 좀 살려 주세요!” 그러나 그는 살려 주기 위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격리를 명령하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그 증오심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참 인정이 없군요." 하고 누군가 어느 날 그에게 말했다. 천만에, 그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스무 시간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참고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인정으로 해서 그는 매일 같은 일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꼭 그만큼의 인정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의 인정이 어떻게 사람을 살려 주기에 충분할 수 있겠는가? (생략)

- 4부 251

 

 

연이은 음주로 고열에 시달리던 룸메이트가 도저히 아픔을 참지 못하고 병원을 가야겠다 맘을 먹었다. 코로나가 아닐 거라고 확신하던 룸메는 검사비용에 대한 걱정에 사실 병원을 포기하고 있었다. 모 대학 병원 선별진료소를 찾은 친구는 검사를 마친 뒤 바라던 진료 대신 1200원어치 타이레놀을 받는게 다였다. 

다행히도 다음 날 아침 일찍 음성인 걸 알게되었고(검사비용도 예상보다 적게 나온대다가) 그걸 증명해주는 문자를 폰에 켜놓은 채 병원을 향했다. 동네 내과는 진료를 거부했다. 재발에 대한 염려와 만에하나를 걱정해서 인지 음성 확인 문자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원래도 투덜거리는게 특징인 녀석이 그런 일까지 겪었으니 뭐 참 옆에서 안타깝고 조금 듣기 힘들고 그랬더랬다. 물론 다른 병원은 주사까지 놓아주며 그에게 아주 큰 만족감을 주었다. 나아진 몸의 기운을 느끼며 그는 ‘(병원이 아닌)약이 최고라고' 몇번을 말하더라. ‘인정 없는' 병원에 대한 친구의 불신불만은 코로나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음주습관도 아닌 다른 무언가에서 비롯되었다.


 

 

(생략) 잠시 후, 랑베르와 리유는 의사의 자동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타루가 운전을 했다.

“휘발유가 동이 났어요.” 시동을 걸면서 타루가 말했다. “내일부터는 걸어 다녀야 해요."

"선생님.” 랑베르는 말을 꺼냈다. “나는 떠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있겠어요."

타루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운전을 하고 있었다. 리유는 피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부인은요?” 하고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랑베르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는데 자기 생각에 변함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이곳을 떠난다면 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남겨 두고 온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도 거북해지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유는 몸을 일으켜 세워 앉으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행복을 택하는 것이 부끄러울 게 무어냐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생략)

- 4부 272

 

 

흠...터레스팅 한 부분이다. 단지 정의로운 재난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본다면 재밌을 요소가 없지만 <페스트>를 읽으며 다가온 복잡다단한 상념들속에서 떠날 수 있음에도 떠나지 못(안)하는 랑베르의 공동체정신은 조금 어색한 감이 있다. 

랑베르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아내를 향한 사랑이 그 자신에게 어마무시한 실행력을 만들었고 그는 오랑 시를 탈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과정속에서 오랑 시에 남은 여러 사람들과 묘한 연대감을 공유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는 결국 잔류와 자원봉사(?)를 선택한다. 

우선 내가 왜, 무엇때문에 위 장면이 어색해보이는지 고민해봤다. 알선생님은 랑베르를 통해 어떤 인간상을 말하고 싶은걸까? 적어도 내가 읽으면서 랑베르에게 기대한 모습은 위와 같은 장면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독서내공 흰띠를 두른 하찮은 내 주관적 취향으로 인해 어색한 것일까? 주관적 취향차만은 아니라는 것을 조심히 변명해보자.

<페스트>는 5부로 구성된 이야기다. 4부는 중후반부를 뜻한다. 4부의 주된 이야기 중 하나는 ‘랑베르의 탈출기' 이기도 하다. 어렵고 추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페스트>에서 랑베르의 탈출기는 다른 어떤 부분보다 사건중심의 극적인 이야기 구조로 전달 하고 있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에 고루 분포 되어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페스트>는 등장인물들의 중요도에 큰 편차를 두지 않는다. 화자는 전지적 시점의 관찰자가 세계관 내에 존재하는 서술자이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특히 리유의 시점과 생각을 베이스 전개되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들은 차분하고 이성적인 어조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앞세우거나 편향되지 않게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적절한 것이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독자 대부분은 책을 읽은 뒤 오랑 시와 오랑 시민들에 대하여 매우 현실적이며 구체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렇기에 랑베르는 <페스트>가 내재한 핵심적인 사상과 다른 모습이 보여지길 기대할 수 있음으로 존재한다. 오랑시민도 아니며 오랑 시에 갇혀 있으며 연대를 느끼는 과정이 크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4부 이전부터 꾸준히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우린 모두 다르다' 라는 간접적인 설명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페스트가 보여주는 인간상'에 대한 이야기이라고 보았을 때, 랑베르의 선택은 달랐어야 한다고 본다. 

...

하아… 말하다보니 엉터리지만 여튼 내 생각은 그렇당...

 


 

(생략) 그래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연적으로 식량 보급이 어려운 지경에 이름에 따라 이 외에도 여러가지 불안한 문제점들이 있었다. 게다가 투기가 성행해서, 일반 시장에 부족한 가장 긴요한 생활필수품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렸다. 그래서 빈곤한 가정은 무척 괴로운 처지에 놓였지만, 반면에 부유한 가정들은 부족한 것이라곤 거의 없었다. 페스트가 그 역할에서 보여 준 것 같은 효과적 공평성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사이에 평등이 강화될 수도 있었을 텐데, 페스트는 저마다의 이기심을 발동시킴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다 불공평의 감정만 심화한 것이었다. 물론 죽음이라는 완전무결한 평등만은 남아 있었지만 그런 평등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처럼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곤한 사람들은, 전보다 더한 향수에 젖어 생활이 자유롭고 빵이 비싸지 않은 이웃 도시들과 시골들을 그리워했다. (생략)

- 4부 308

 

 

알선생님도 불가능하다고 보는 느낌이다. 과연…’재난으로인한 불평등 없도록 하겠다'는 희망이 희망으로 묻히지 않을 수 있을까…바야흐로 ‘K’ 열풍이니까 믿어봐야하나…


5부


 

(생략) 반대로, 인간을 초월해, 자기로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던 사람들은 결국엔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타루는 그가 말하던 소위 마음의 평화라는 어려운 것에 도달한 듯 싶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을 죽음 속에서, 이미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말았을 때에 가서야 겨 우 발견했던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 즉 집집의 문턱에서 기울어 가는 햇볕을 받으며, 서로를 힘껏 껴안은 채 정신없이 마주 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바라던 바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리유는 그랑과 코타르가 사는 거리로 접어들면서, 적어도 가끔씩은 기쁨이라는 게 찾아와서 인간만으로, 인간의 가난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사랑만으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람을 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5부 391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문제집에서 자주 보던 학생 시절에 이 시를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굳이 다 안읽어도 기억에 잘 남아있어서 문제 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답률도 낮았다. 더 이상 시를 읽을 수도 없을 뿐더러 읽을 줄도 모르는 지금, 내 가난 혹은 검소한 마음에 떠나지도 정착하지도 못한 채 하릴없이 떠돌아 다니는 몇가지 중 하나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코로나 덕에 이렇게 대낮에 카페에 앉아 키보드 두들기며 고민해본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부자가 되기 글렀다고 한다. 적어도 가난 할 수 있으니 사랑 할 수 있다고 알선생님이 위로해주는 느낌이다.


 

(생략) “아!” 하고 그 노인은 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페스트로 죽었지요." 라고 리유가 덧붙였다. “그랬군요.” 잠시 후에 노인이 말했다. “언제나 제일 좋은 사람들이 가버리는군요. 그게 인생이죠. 하지만 그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 분이었죠."

“왜 그런 말씀을 하시지요?” 청진기를 집어넣으면서 리유가 말했다.

“그냥요. 그분은 그저 무의미한 말은 하지 않으셨어요. 어쨌든 나는 그분이 좋았어요. 그냥 그랬다 이겁니다. 딴 사람들은 '페스트예요. 페스트를 이겨냈다고요.' 하고 난리를 치죠. 좀 더 봐주다간 훈장이라도 달라고 할 판이죠. 그러나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찜질을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오! 염려 마세요. 나는 아직 멀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죽는 것을 보고 죽을 거예요. 나는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중략) “그런데 선생님,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념비를 세운다는 게 정말인가요?” "신문에 그렇게 났더군요. 석주(石柱)를 세우거나 동판을 붙일 거라고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연설들을 하겠죠.”

노인은 목이 비틀리는 소리로 웃어 댔다.(생략)

- 5부 399

 

 

노인을 보면 지금 살고 있는 빌라의 임대인이 떠오른다. 거의 한 세기를 겪은 그는 인고의 흔적이라고는 1도 찾아 볼 수 없는 듯하다. 일편단심 민들레 마냥 오롯이 단순무식하게 남을 내리깔며 살아남은 듯한 그의 생명력은 가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노회하지도 않다. 정말 그냥 ㄹㅇ 쉬운인생이 눈에 보이는 그런 사람. 유일하게 발달한 ‘무시하기’ 능력엔 고뇌라곤 보이지 않는다. 여튼 그런 임대인이 노인을 통해 떠올랐다. 왜인지는 잘 몰겟 @.@...

조금 숨을 돌리고 나니 내가 바라보는 임대인에 대한 생각이 오만일 수도 있겠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누가 누굴 이해하겠는가. 이미 내가 그의 손바닥에서 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는 미움받을 줄 아는 사람이다. 모두가 그를 미워하고 그는 누구보다 부유하게 살고 있다. 코로나가 모두에게 힘들거랬지만 그에겐 허튼소리였다. 그는 미움받을 용기가 있었기에 누구보다 풍요롭게 잘 살고 있다. 코로나는 그런 마음이었다. 코로나는 부담스러운 이기심을 위로해준다. 진작에 그러지 못한 것을 반성하게 한다. 보이지 않던 숫자들이 시야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렵사리 털어낸 치졸함이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머리를 파헤치던 온갖 자해들이 아물 겨를 도 없이 허기진 입과 배는 아스피린처럼 온몸으로 퍼진다.

<페스트>를 위한 알선생님의 이야기는 리유와 같은 영웅이 결국 부각된다. 대형서점엔 그의 서거 60주년을 기념한 판매 행사가 한창이다. 그리고 세상은 마치 기념에 동조하듯 코로나가 한창이다. 61주년조차 기념할까봐 온 세계가 걱정이다. 백신개발과 연관된 전세계 수많은 제약회사들은 주가가 극단적으로 치솟는다. 돈을 쓰러담는 자들 사이에서 확산위험지역에 파견되었던 의료인들은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확진자 동선에 전국민의 이목이 쏠리고 바다건너에선 매일 5만명이 확진판정을 받는다. 

(아래 스포가 있다. 스포 없이 글을 쓰고 싶지만 너무 미천한 실력이기에…)

노인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페스트는 사라졌다. <월드워 Z>의 항체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꺼져가는 불씨같은, 하찮은 생명력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랑은 아니지만 서울에 살고 있다. 항체보다 중요한 것을 임대인에게서 보았다. 리유도 아니고 타루도 아니었다. 랑베르의 극적 행동은 인상적이긴 하다. 카뮈가 소설을 쓰기전 발발한 펜데믹인 스페인 독감은 2년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이 있었다고 들었다. 리유는 아마도 스페인 독감 2년을 버텼을 것이다. 그는 과연 코로나시대에도 판정에 매진하며 2년을 버틸 수 있을까?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다. 이러다간 ‘자신'도 사라질 거 같다..

 

 

 

제임스 딘과 알베르 카뮈의 사진을 보면 담배가 무해백익한 느낌을 준다.제임스 딘과 알베르 카뮈의 사진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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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무해백익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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